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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Bible Study


2001.1.7. 워싱톤서(1) - 조영진 목사

나는 누구입니까?

로마서 1:1-7

살아가면서 가장 근본적이지만 가장 무관심한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 물음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이 근본적인 물음에 나는 어떤 해답을 갖고 있습니까?
어떻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까?

새 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기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우리는 2001년을 맞이했습니다. 금년은 특히 저희 교회가 세워진 지 5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뜻 깊은 해를 맞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우리 모두 보다 성숙한 교회로 깨어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50주년을 준비해가면서 제 가슴 속에 기도제목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단을 책임 맡고 있는 목사로서 어떻게 50주년 되는 해에 뜻 있게 말씀을 전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는 가운데서 내린 결론은 1년 동안 로마서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는 교회 역사에서 갱신과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어 왔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이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도 로마서에 힘입은 바가 컸었습니다. 또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John Wesley가 Martin Luther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그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의 세 번 째 전도 여행기간 동안 여러 교회들이 모아 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지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고린도에 머물면서 쓴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주후 57년경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는 금번 강해 설교의 제목을 "워싱톤서"라고 부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지만, 오늘 위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로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번 강해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밝히, 분명하게, 파헤치고 전하는 것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체험했던 그 복음의 능력, 그 뜨거웠던 가슴을 우리 모두도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선 제 자신부터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되찾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말에 있지 않고, 인생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I

오늘 봉독 해 드린 말씀은 로마서의 서두로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문안과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을 넘어서는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분명한 자기이해 입니다. "나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고백 위에서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시작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데도 가장 경시되어지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보편화시켜서 우리는 누구인가? 혹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물음입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젊은이들을 지도할 때, "나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토의 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우선 자기 이름을 대면서 나는 아무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는 주소를 말하고, 부모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아무개의 친구이고, 어느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저는 그것이 전부인가? 그것이 여러분의 전부인가? 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은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25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나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대답을 갖고 계십니까?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골치 아픈 문제라고 접어 놓고 40년, 50년, 60년을 살아 오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잃어버린 채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누구인줄도 모른 채, 이런 물음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잃어버린 채,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불교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친구들이 그룹으로 산에 소풍을 갔습니다. 일행 가운데 한 여자는 잘 모는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은 어째든 신나게 놀았습니다. 노는 동안 이 여자는 벗어놓은 저고리와 가방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사라졌습니다. 나중에야 이 일을 알게 된 친구들은 허겁지겁 산을 헤매고 다녔지만, 이 여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찾다가 그들은 도를 닦고 있는 한 수도승을 만났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찾느냐?"고 수도승이 묻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여인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잃은 것은 옷이나 물건이 아니라, 당신들 자신입니다. 찾아야 할 것은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당신들 자신입니다."

돈을 잃었다면, 열심히 찾을 것입니다. 인기를 잃었다면,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나, 내 인생을 잃고도 사람들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찾는 일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상입니까? 이것이 옳은 것입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II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아니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는 자신을 첫째는 그리스도의 종, 둘째는 사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러 편지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말의 개념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표현은 "노예"라는 말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전파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들을 가리켜서 "종님"이라고 부르는데, 낯설기 이를 데 없는 표현입니다. 종이면 종이지 종님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 다면 어떻게 느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만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다는 말은 우리 모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님의 노예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노예라는 말씀 앞에서 혹시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노예는 무슨 노예인가? 나는 자유인이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정말 자유인이십니까? 그리스도 없이 참으로 자유할 수 있으십니까? 아니 여러분의 이해하는 자유란 어떤 자유입니까?

어떤 사람은 재물에 매인 노예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내 생각"이란 사슬에 매여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무언가에 매여서 인생을 살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매일 바에야 그리스도에게 매이는 것 보다 더 고귀한 인생의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사도 바울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렸습니까?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의 노예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됨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찾는 길입니다. 나의 정체성, identity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데서 찾아집니다.

(2) 둘째로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사람" 혹은 "대리자"라는 뜻을 갖습니다. 처음 사도는 세례요한 때부터 주님과 같이 한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택하셨고, 또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로 12 제자에 국한되었으나, 후에는 범위가 넓혀져서 바울과 바나바, 야고보와 주의 형제도 포함되었습니다.

바울, 그는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확신 위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 됨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라고.

사도 됨에 대한 고백은 곧 그의 인생의 사명에 대한 발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까? 어떤 목적을 위해서 택함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온 인류와 세상, 아니 나와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속에서 이 복음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미 약속하신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거룩한 영으로는 부활을 통하여 능력으로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인정되셨다"고 옮겨놓고 있지만, 본래의 뜻은 부활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declare, 선포되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합니다.

그는 이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는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도답게 충성스럽게 삶을 마쳤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사명을 찾았습니다. 복음 안에서 일감을 찾았습니다. 복음 안에서 생명을 걸 수 있는 일, 삶을 바칠 수 있는 사명을 찾았습니다.

III

여러분,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찾았습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이 되십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찾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온전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 우리 모두를 지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 분께 돌아가지 않으면 해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해답의 출처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인생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다면, 아마도 그 해답도 저절로 찾게 되기를 기대해야 될 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하여 지음 받은 인생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길을 잃은 인생들을 위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복음은 바로 나를 찾는데 결정적인 길잡이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 분은 오늘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길이 되십니다. 그 분은 오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Daddy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예수의 노예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고 믿는다면, 적어도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그리스도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서는 온전한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나치 독일에 저항운동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사형을 당한 본 훼퍼 목사는 옥중에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지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자유롭게, 다정하게, 맑게,
명령하는 것이 나인 것처럼,
간수들과 내가 대화한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침착하게, 미소하고, 자랑스럽게,
승리에 익숙한 사람 같이,
불행한 나날을 내가 참고 있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새장 속의 새와 같이 불안하게, 그리워하며 병들었고,
목을 졸렸을 때와 같이 숨을 쉬려고 몸부림치고,
색채와 꽃과 새 소리를 갈구하고,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을 그리워하고,
자의와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에 몸이 떨리고,
대사건에의 기대에 사로잡히고,
저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다 낙심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 데 지쳐서 허탈에 빠지고,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일까?
양자가 동시에 나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약자일까?
혹은 아직 내 속에 있는 것은,
이미 승패가 난 싸움에서,
흩어져 퇴각하는 패잔의 군대와 같은 것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건,
아 신이여 당신은 나를 아시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습니다. 길을 찾습니다.

IV

한 어떤 모텔에 한방에 흑인과 백인이 하루 밤을 같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잠이 든 백인이 어떻게 코를 고는지 흑인은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화가 난 흑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백인의 얼굴에 검은 칠을 잔뜩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먼저 모텔을 나섰습니다. 늦게 서야 일어난 백인은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랬더니 웬 흑인이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거울 속을 한참 드려다 보던 백인은 중얼거렸습니다. "어제 밤 한방에서 잔 흑인은 여기 있는데, 백인인 나는 어디로 갔는가?"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오늘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는 오늘 어디 가 있습니까? 아니 그리스도의 노예인 나는 오늘 어디 가 있습니까?

* 적용을 위한 질문

1. 내가 아는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서 가장 은혜로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서로 나눕시다.

2.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오는 나는 어떤 대답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3. 어디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나는 진정한 정체성 identity를 찾을 수 있습니까?